눈
내가 단 하루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16살 무렵 눈이 내리는 바다에 서 있는 장면일 것이다. 물론 눈이 내리는 바다에 서 있는 장면은 앞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장면을 재연하려고 한다면 계획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장면을 너무 완벽하게 재연하려고 할수록 그 과거의 장면은 현재와 멀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만다.
눈이 내리던 겨울방학에 나는 강릉 집에서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바다를 혼자서 간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대부분 각자의 청소년기를 떠올리면 그때 무슨 마음을 가졌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듯이.
그러나 지상으로 내리는 눈이 출렁이는 바다에 흔적도 없이 녹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면서, 오직 이 장면을 위해 내가 여기까지 왔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눈은 오로지 소멸되기 위해서만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미래가 얼마나 남았는지, 어떻게 펼쳐질지도 모른 채로 그 자리에 서서 그 소멸되는 감각을 느껴보는 것이 좋았다. 그런 뜻하지 않은 장면이 내게 주어진 것이 좋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이 언제 잠에 들지 모른 채로 잠에 드는 것처럼. 다시 그 사람이 긴 시간동안 잔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그리고 눈이 내리지 않을 때에도 머릿속이 하얘지는 그 순간을 나는 종종 경험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는 지도 모른 채로 영화 안에 인물의 감정 선을 따라갈 때. 기차 창 바깥에서 풍경을 보는 지도 모른 채로 스쳐지나가는 이름 모를 마을을 바라볼 때. 마주치는 지도 모른 채로 경계심이 가득한 거리의 고양이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멍하니 생각에 빠진 모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의 머릿속이 서서히 새하얘지는 순간을 말리고 싶지 않다. 바라볼수록 소멸되기만 하는 그 장면이 완전히 소멸되기 전까지 떠올렸으면 좋겠다. 우리가 무언가를 떠올리는 순간은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니까. 우리는 매일 천장에서 눈한송이가 떨어지고 나서야 잠에서 깨는 지도 모르지. 이미 녹아버린 눈송이를 아무도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안다, 단 하나의 눈송이가 떨어지는 장면이 언제나 되풀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 단 하나의 눈송이가 여러 눈송이가 될 때까지.
아마 16살 무렵의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10년이 지난 후에도 떠오를 것을. 16살 무렵의 눈송이는 모두 소멸되었지만 그 소멸되는 장면을 되풀이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우연하게 나를 찾아올 것을.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처럼.
이번 겨울에 운 좋게 눈 내리는 바다를 내가 볼 수 있다면. 그 바다에 도착한 내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16살 무렵의 나는 사라져 있을 것이다. 과거에 살고 있는 16살 무렵의 내가 고개를 돌리면 27살의 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지만 27살의 내가 16살 무렵의 눈 내리는 바다에 있는 나를 떠올리는 것처럼, 16살 무렵의 나는 27살에 바다에 있을 미래의 나를 상상해볼 수도 있겠지. 영영 만나지 못하는 서로를. 소멸되는 감각만을 가진 채로 눈 내리는 바다에 서서, 절대 소멸되지 않는 기억의 방식으로.
눈
눈 녹듯 사라진다, 라는 표현을 자주 생각한다. 눈이 녹듯이 사라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눈 녹듯 사라지는 것만큼 슬프고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이다.
혼자서 눈을 처음 본 장면보다, 어느 겨울에 강아지와 함께 첫 눈을 맞이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건 내가 눈을 맞는 강아지의 반응을 살피었기 때문이다. 강아지에게 눈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러나 눈에 대해서 내가 강아지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졌다고 해서 내가 눈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그저 강아지가 눈에 몸을 부비는 장면이 좋았다. 나도 그 옆에서 강아지와 함께 눈에 몸을 부비었다. 그리고 지금은 강아지도 눈도, 강아지와 어린 내가 눈에 몸을 부비던 장면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슬픔을 회복하기 위해서 매년 눈을 기다리는 지도 모른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은 미래의 눈이기 때문이다. 그건 오고 있다. 매년 한 살을 먹는 나와 함께 지금 막 태어나서 첫 눈을 보게 될 한 마리 강아지의 미래와 함께 오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이야, 라고 자주 말하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은 처음이야.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야.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해준 사람은 처음이야. 처음이라는 말도 지금 막 눈 녹듯이 사라지지만. 처음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지만, 생경해지려는 것이다.
녹은 자리에 다시 내리는 눈. 잊을 만 하면 새롭게 돌아와서 내리는 눈. 나는 이제 강아지를 키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눈 녹듯이 강아지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강아지와 아이가 눈을 보는 풍경을 몇십 년이나 더 볼 수 있고. 이렇게 눈 녹듯 사라진 이미지를 쓸 수 있다.
그렇게 이미지는 눈이 내리고 녹아갈 사이에서 영원히 재생되고 있다.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영원에 한 없이 가까워지려고 한다. 누군가 그 이미지를 보고, 이런 이미지는 처음이라고 말하면 좋겠다. 그렇게 영원히 처음이 되어가는 장면에 내가 마중 나가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나와 함께 눈에 몸을 부빈 강아지가 누군가에게 달려갔으면 좋겠다. 처음 보는 것처럼 눈을 두리번 거려보자. 지금 막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눈이 내린다.